안녕의 역사 – 소크라테스에서부터 스토아학파까지

소크라테스

그리스 지식 사회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인물은 소크라테스이다. 그는 인류의 지식과 특히, 풍성한 삶의 본질에 관한 생각들 또는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 실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이성을 도입하였다. 그의 교수법에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단언하였다. 진리의 추구는 인간 정신에 관한 불변의 진리를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진정한 행복은 자기지식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은 곧 지혜와 개인 영혼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단지 자기 멋대로이거나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좋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덕성의 정수 또는 핵심을 알아야만 한다-풍성한 삶의 핵심 요소를 알아야만 한다. 소크라테스는 한 번 그 핵심의 진정한 본질이 밝혀지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추구될 것이며 덕스러운 행동을 유발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각되는 형태의 지식은 불신했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지혜란 영원 불변한 진리를 표상하는 실재에서 발견되어야만 한다. 감각적 경험이나 감정에 기반한 탐색이나 안녕은 어떤 것이든 그와 같은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적 환경에 반응하여 지속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발자취를 따른 사람은 그의 수제자인 플라톤이었다. 플라톤 역시 가변적인 감각 경험은 진정한 지혜의 바탕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 오히려, 진정한 지혜는 감각적 세계를 초월한 불변의 영역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지혜의 궁구는 표면적 외양의 저변을 보고 이미 지각된 개념이나 가정들에 도전하는, 열정적이고도 어려운 탐색에 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구를 위한 방법은 이성과 직관이다. 이 탐색에 착수하는 사람은 표면적 외양과 단순한 감각적 경험 저변에 숨겨진 진리를 찾기 위한 용기를 지녀야만 한다.

플라톤의 유명한 비유에서, 그는 대부분의 남자와 여자들은 동굴 속 사슬에 묶여 있어서 안쪽 벽밖에 볼 수 없는 사람들에 비유하였다. 동굴 밖에 사람들이 지나갈 때, 밝은 태양은 그 그림자를 동굴 안쪽 벽에 투사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동굴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 그림자를 “실재”로 지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실재를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 철학자는 그 사슬을 느슨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그 태양”의 밝음을 머금고 마침내 동굴 밖의 진정한 진리를 보게 된다.

오늘날, 감각 경험을 초월한 삶의 더 깊은 곳에서 행복이나 풍성한 삶을 찾으려는 관점들은 모두 플라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여기에는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는 것,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무의식적 동기를 살피는 것과 더 깊은 의미를 향한 영적인 추구뿐 아니라 안녕의 추구에 관련한 다른 내적인 지침들이 포함된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서구의 지성적 전통이 중대한 전환기를 맞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보편적 진리는 세계의 질서에 대한 지적인 발견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추구의 매개는 오감일 것이며, 그 도구는 논리, 분류, 정의가 될 수 있다.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고상한 진리와 안녕의 추구에 있어서 심오한 실재를 찾는 데 감정이나 직관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이상은 평형과 조화, 그리고 감정적 극단의 회피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감정은 엄격한 자기 훈련을 통해 길들여져야 하며, 이성의 지시를 받아들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표 중 하나는 양 극단의 사이에 위치한 “중용”을 찾는 것이었다. 중용은 균형과 조화, 평정이 이루어지는 점으로서, 유대모니아의 원칙에 따른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Robinson은 유대모니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참되고 지속적인 기쁨을 이루는 완성과 번영의 상태인 … 유대모니아는 단순히 일련의 유쾌함 또는 피조물의 편안이나 에피쿠로스적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지고 있는 인생으로, 여기서의 인생은 삶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지, 서로 얽혀 있는 몇 개의 순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최종점을 향한 진보는, 더 나은 행동 방침이 현재의 욕망 또는 영속적인 욕망을 일률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불러 일으킨다. … 지혜롭다는 것은 도덕적 완성 또는 덕성의 상태를 갈망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중용”이 발견되고 인생의 모든 중요한 일에서 채택된다.”

그렇다면 풍성한 삶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의 맥락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순간적인 상태나 혹은 심지어 한 가지 특수한 감정이 아니다.

유대모니아는 항상 “행복”으로 번역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참으로 복 받은” 혹은 “진정한 안녕을 소유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여기서 제시된 관념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바랄 만한 가치를 갖고 있으며 ㅇ인생에서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가진 사람이다. 여기에 함축된 생각은 인생의 특정한 목표 또는 목적이 긍정적 감정을 낳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유대모니아로 이끄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면에서, 가치 또는 목표야말로 미래를 위한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유대모니아를 향한 추구는 그 사람을 이 이상을 향한 삶으로 이끌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계발될 경우 유대모니아의 경지로 사람을 이끌 수 있는 성격 기질로서의 열두 가지 덕성들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용기, 관대함, 긍지(자기 존중으로서), 친근함, 재치, 정의, 절제, 기품, 좋은 천성, 정직성, 부끄러움(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알맞은 죄책감), 명예이다. 이 덕성들은 양 극단 사이에 위치하는 중용의 예라고 여겨진다. 예를 들면, 용기는 무분별함의 과도함과 비겁함의 모자람 사이에 놓여 있다. 이 덕성들은 사람이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행복의 자연주의적 개념을 대표한다. 우리의 타고난 잠재성을 알아차리고 계발하는 것이 행복을 찾아 준다.

행복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행복의 덕성 이론이라고 일컬어졌다. 이 이론에 깔린 생각은 특정한 덕성의 계발과 발달이 최고의 안녕 상태로 한 사람을 이끌고 결국 그것이 풍성한 삶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성 명령 이론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해야 할 구체적인 행동들을 나열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단일한 행동도 그것이 발생한 구체적 상황에 따라 덕이 될 수도 있고 악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안녕에 대한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리라고 명명되었다. 왜냐하면, 안녕, 덕성, 그리고 실용적 지혜는 각각이 연속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모두 상호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신 건강에 관한 많은 이론들은 건강한 성격 발달과 관련되는 일련의 훌륭하고 덕스러운 특질들을 가정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긍정 심리학 역시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강점과 덕성을 향한 추구로 정의된다.

에피쿠로스 학파

기원전 4세기 말 무렵,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에피쿠로스 학파를 차잇하였다. 쾌락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행복이란 정치적 세계를 떠나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서 찾는 단순한 쾌감이 조용히 존재하는 상태를 계발하는 데서 얻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아늑한 여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정원 철학자들”이라고 알려졌다. 풍성한 삶과 행복을 안식, 중재된 쾌감, 고통 또는 걱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세련된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과 연관 짓는 태도는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많은 관점들이 안녕을 지적 자극, 중재된 쾌감, 감정을 조절하는 더 나은 능력 수준, 긍정적 인간관계, 그리고 낮은 수준의 스트레스의 측면에서 바라본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과 심리학자들은 현대의 에피쿠로스 학파라고 간주할 수 있겠다.

스토아 학파

스토아 철학은 쾌락주의가 생겨난 비슷한 시기에 철학자 Zeno에 의해 창시되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감정이란 필연적으로 불행으로 이어진다고 느꼈기 때문에, 인간의 감정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큰 슬픔을 모르고는 큰 기쁨을 알 수 없는 법인데, 왜 기쁨과 쾌락을 추구하는가라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지속되는 마음의 평안을 찾는 길은 이성을 사용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훈련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스토아 철학은 결국 로마 시대의 주요한 철학 학파들 중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스토아적 생각에 기반한 행복에 대한 접근이 다수 존재한다. 이러한 접근들은 보통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사용함으로써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조절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다소 익살맞게도 Keifer는 지식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접근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한 번 그 단순명료한 원칙을 파악하고 나면, 잔인한 자기 비하를 하루에 몇 시간씩 견디는 사람은 누구든 철학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 철학에 대한 Keifer의 정리에 반박할 여지는 있지만, 그리스인들이 제안한 자기 인식, 이성, 논리에 근거한 안녕의 추구에 이르는 민주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었다. 그리스인들이 서구 문명에 남기고 간 신화는 가치를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모자랄 만큼 중요하다. 사람들이 풍성한 삶의 본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해서는, 안녕과 만족을 어떻게 얻을지에 대한 현재 입장들의 대부분은 그리스인들에 의해 이미 한 번쯤은 제시된 것들이다. 또한, 안녕의 추구에 있어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가능한 선택사항의 상당한 다양성은 고대 세계의 역사상 유일무이하다. 불행히도, 이성적 분석과 신념을 선택하는 자유, 그리고 정직의 추구와 지혜 및 진리를 향한 면밀한 궁구를 강조했던 그리스인들의 정신은 중세를 거치면서 사라졌다. 이와 같은 특성들은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명사회에서 안녕 추구의 중심에 다시 자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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